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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0. 10世 〉44. <태사공>성균진사증승지공휘필묘표(成均進士贈承旨公諱弼墓表)
1. 문헌 목록 〉11. 11世 〉1. <요재공>미재공휘여충묘갈명(嵋齋公諱汝忠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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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태사공>통훈대부강진현감공휘유묘비문(通訓大夫康津縣監公諱愈墓碑文)衣履藏碑
<태사공후>통훈대부강진현감공휘유묘비문(通訓大夫康津縣監公諱愈墓碑文)衣履藏碑 公生時禮家文學宜其也襲而兼治弓馬竟以武登萬曆乙西第盖島夷作釁知者生見而國家恬憘倉卒有事管葛束手才咯氣義公所自負雖執殳前驅以盡吾臣分耳及其出官康津以禮率下使知向上之爲義故擧旗一號衆皆樂赴勤王西上至淳化之射亭野遇賊猝至賊衆我寡而如入無入手殪數十百人而公亦中丸而殞時公之子進士思義在陳後督戰聞燮號痛揮釼馳突而入賊徒披靡走散求其屍而不得收甲胃衣履爲阡於廣德山下舞抽洞後以金夫人葬祔左嗚呼見賦無勇非義士以賊遺君非忠臣公以零星單卒身蹈白刃一死而不顧者君耳國耳凜凜忠義與秋色爭光而上不褒功下無作傳獨琴臺矗石名於後世爲臣盡職在公固無餘憾而後世志士之恨爲如何哉見今壬辰之遺種作蘗於國竊想公己死之膽輪困如斗而九原莫作斬殪無人悲夫悲夫公諱兪字敬之趙氏玉川人考世球參奉妣定山吳氏父斗寅祖之瑗展力副尉曾祖季善彰信校偉龍讓偉司直高祖從南中郎將浣正順大夫宗簿寺事中門祇候元琦上柱國璵版圖判書洪珪五世以上也金夫人籍光山承旨世重女二男思仁思義公生年與卒月日家牒不傳甞聞淵泉洪相公奭周入相欲以公立慬首尾建白褒贈見遞未果時有顯晦者然耶後孫驥燮章燮維燮草公事行求爲銘衣履爲阡禮不經見而雲仍羹墻亦不可謂無徵銘曰人孰無死死死毅魄猶生精忠不酬典禮有闕顯晦有時以竢來百 歲辛丑二陽月 幸州 奇宇萬 撰 통훈대부강진현감공휘유묘비문(通訓大夫康津縣監公諱愈墓碑文) 공이 시예를 숭상한 집안에 생장하였으니 마땅히 그 문학을 세습하였을 것이고 겸하여 활과 말을 배워 마침내 만력을유(萬曆乙酉)一五八五년에 무과에 오른 것은 대개 섬오랑캐가 작란할 것을 아는 자는 먼저 보았고 나라가 안락을 일삼을 때 불의에 일이 일어나면 관중(管仲) 제갈(諸葛)이라도 손을 묶여 계책이 없을 것이나 공은 자부한 재주와 의기로 비록 세발창을 잡고 선봉이 되어도 내 직분을 다할 것이다 하였다. 강진 현감이 되어 예로써 아래 사람을 거느리고 향상의 뜻을 가르친고로 기를 들고 한번 호령하매 뭇 사람이 다 즐겨 왕사(王事)에 부따르므로서 편으로 향하여 순화의 사정들(淳化射亭也))에 이르러 불의에 일은 적을 만나 적은 많고 나는 적으나 무인지경같이 들어가 손으로 수十百인을 죽여 없애고 공이 또 탄환을 맞고 운명하니 때에 아들 사의(思義)가 진두에서 독전하다가 변을 듣고 통곡하며 칼을 휘둘러 진을 혜치고 돌입하니 적도가 쓰러지며 도주한지라 그 시체를 찾다가 찾지 못하고 갑옷과 의복을 거두어 광덕산 아래 무수동(廣德山下舞袖洞)에 묻고 뒤에 김부인을 부좌하였다. 오홉다 적도를 보고 용맹이 없는 것의 의사가 아니요 적으로써 인군께 끼친 것은 충신이 아닌데 공은 작은 군졸로써 몸소 칼날을 밟으며 죽고 돌아보지 안한 것은 인군이요 나라 때문이었다. 늠름한 충의가 가을빛으로 더불어 빛을 다투었는데 우에서 공을 포양치 않고 아래서 전을 지음이 없으며 홀로 금대(忠州張琴臺) 촉석(晉州矗石樓) 만후세에 울었다. 신하의 직분을 다한 공에게 무슨 여한이 있으랴만은 후세에 뜻있는 선비의 한이 어떠하겠는가. 이제 임진(壬辰)년 남은 씨가 나라에서 작간하니 내가 생각컨대 공은 이미 죽은 담이 말같이 서릴것이나 황천(黃泉)에서 죽여 없앨 수 없고 또 그럴 사람이 없으니 슬프다. 공의 휘는 유(兪)요 자는 경지(敬之)며 옥천인인데 고세구(世球)는 참봉이요 비는 정산오씨 두인녀(妣定山吳氏斗寅女)며 조는 지원(之瑗)인데 전력부위(展力副尉) 고증조 계선(季善)은 창신교위룡양위사직(彰信校偉龍讓衛司直)이요 고조 종남(從南)은 중랑장(中郎將)이며 정순대부 종부지사 완(浣) 중문지후 원기(元琦) 상주국 여(璵) 판도판서 홍규(洪珪)는 五世 이상이었다. 부인은 광산김씨 승지세중(世重)녀로 二남을 두었는데 사인(思仁) 사의(思義)요 공의 생졸월일은 가첩에 안보인다. 일찍 들으니 연천홍상공석주(淵泉洪相公奭周)가 정승으로 있을 때 공의 전사한 사적을 주달하여 포양하려다가 면관(免官)되어 이루지 못하였다 하니 운명이로다. 후손 기섭(驥燮) 장섭(章燮) 제군이 공이 사행을 초하야 묘갈을 청하니 옷과 신발을 묻어 성분한 것을 예경에 못 보았으나 자손추모에 증거가 안된다 말할 수 없도다. 새겨 가로되 사람이 누가 죽음이 없으리요 죽을 때 죽으면 광영이다 人諾無死死死則榮 공은 실상 죽을 때 죽었으니 굳센 혼백이요 오히려 살았다 公實死死毅魄猶生 정충을 갑지 못하였으니 예가 궐하였다. 精忠不酬典禮有闕 나타남과 알려지지 않음이 때가 있으니 써 내후를 기다릴지어다. 晦有時以竢來百 歲辛丑十二月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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